모범생이 싫다

유학생활 : 2008. 1. 3. 12:47   By LiFiDeA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 종종 붙은 수식어로 ’모범생’이 있다. 이 말은 1)공부를 잘 하고 2)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로 긍정적인 늬앙스로 사용된다.(한국에서는 1)과 2)가 거의 동의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 말을 상당히 많이 들어온 데다, 주변을 둘러봐도 ’모범생’이 가득하다.

이 말에 대해 원인모를 거부감을 가져왔던 내게 최근에 그 실체를 파악하게 해준 책이 있으니 바로 시오노 나나미(이하 시오노상 — 그녀가 사람들에게서 원하는 호칭이란다.)의 ‘남자들에게’ 였다. 관습보다는 독창성을, 지능보다 판단력을, 눈에 보이는 핸섬함보다 보일듯 말듯한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시오노상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남자의 모습에 대해 쓴 에세이다. 20대에 단신으로 유럽에 건너가 동서양을 넘나드는 온갖 체험을 하며 혼자 서양 고대사를 탐구하여 거의 대가급 작가가 된 여인의 남자론이니 한줄 한줄의 무게가 남다르다.

시오노상은 ‘매력있는 남자’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한다.

매력 있는 남자란 자기 냄새를 피우는 자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무슨 무슨 주의주장에 파묻히지 않고 유연한 사람. 그러니 더욱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바로 그런 자다.


이 부분을 읽으며 온몸을 휘감는 전율을 느낀 것은, 내가 생각하는 삶의 지향점의 정수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갖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냥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싫었다.

’모범생’이라는 말이 싫었던 것은, ’모범’이라는 말에 자신의 목소리 보다는 관습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기준에 충실하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세상에 자신을 끌어다 맞춤으로써 얻어지는 안전한 보상에 가치 기준을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모범생을 거부하는 것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며, 동시에 이를 객관적 진리, 그리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만의 ‘의미있는 목소리’를 갖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순응이 던져주는 달콤한 미끼를 덥석 베어물지 않아야 한다.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주어진 환경이 감사하기도 하다. ’세상’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오노상은 이런 말도 했다.

자유를 제한받은 곳에서 참된 자유가 발휘된다. 정신활동의 완전 연소는 어느 정도의 구속 없이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며 가끔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요즈음, 이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유학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3과 대학원  (2) 2008.02.03
좋아하는 일 지켜가기  (1) 2007.11.03
유학생 살아남기  (0) 2007.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