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과 대학원

유학생활 : 2008. 2. 3. 12:53   By LiFiDeA

대학원에 진학하며 생각한 것 중 하나가 ‘고3때 처럼만’ 이었다. 부끄럽게도 스스로 가장 치열하게 살았다고 기억되는 때가 고3이였던 까닭이다. 아침 자율학습을 시작으로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그것도 모자라 도서관까지 갖다 집에 오던 날도, 공부가 잘 되던 날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것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일까.

어른이 되어 원하는 전공(전자)을 선택했지만 생각만큼 몰입할 수 없었고, 전공 공부보다 인생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학부 생활을 거쳤다. 그 후 정말 이거다 싶은 분야를 찾아 시작한 대학원 생활을 고3의 각오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대학원과 고3은 비슷한 점도 많다.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쏟아 넣어야 하고, 끊임없이 한계를 시험함으로써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 성과에 대한 엄밀하고 끊임없는 피드백(모의고사, 논문)이 주어진다는 점도 같다.

하지만 몇달이 지난 지금, 고3처럼 대학원 생활을 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고3 생활을 겪어내며 생긴 사고방식과 습관이 대학원 공부를 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까지 느껴진다. 고3과 대학원은 전혀 다른 게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고3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잘 정리된 교과서와 참고서를 반복 숙달하며, (과외) 선생님이 떠 먹여주기도 한다. 공부에 대한 주된 동기는 주로 부모님과 선생님에게서 나온다. 이 게임에서 성공하는 학생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바라보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교과서를 감히 의심하거나, 그 이상을 알려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다. 시험 점수를 받을 수만 있다면 무턱대고 외워도 되기 때문이다. 출제 경향을 짚어 전과목에 적절한 시간을 배분하고, 빠른 시간에 정확하게 답을 골라내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대학원은 이와 다르다. 여기서는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 정의하고 발견해 나가는 공부를 한다. 또한 이해의 깊이가 핵심이기 때문에 ‘전과목에서 고른 성적’을 받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끊임없이 묻고,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여 이론을 만들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능력이다.

지나친 이상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대학원생들이 자신보다는 지도교수에 의해 주어지는 일을 하지 않냐고, 대부분의 경우 그저 때맞춰 졸업하여 그럴듯한 곳에 자리잡는 것이 목표 아니냐고 말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도 여기 오기 전에는 비슷한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원하는 공부를 한다는 핵심 동기가 있었지만, 주변에서 ‘눈 딱감고 5년만 버티면 된다’는 말을 들어도 별 거부감이 없었다. 고3때처럼 ‘밝은 미래’를 떠올리며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면 될 줄 알았다.

여기 와서도 처음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려운 수학책을 진도에 맞춰 읽기도 했고, 일년 내에 첫 논문을 쓰겠다고 랩에서 연구 주제를 붙잡고 늦게까지 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했던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연구 자체도 뭔가 꽉 막힌 느낌이었다.

몇달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환경에서 부모님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라면 좀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타국에서 혼자 수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인생의 황금기에 말이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대학원 생활은 고3처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공부를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하는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창조에 필요한 에너지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다는 것,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정해진 목표에 스스로를 얽매기보다는, 자신의 분야에 푹 빠져 스폰지처럼 지식을 흡수하고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자유를 만끽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할 내용을 해치워야 하는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시험만 끝나면 다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벗삼고 키워가야 할 지식이니 말이다. 그제서야 외계어처럼 보이던 책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서야 주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리고 예민했던 시절에 각인된 습관을 버리는 일이니 말이다. 심지어 고3 생활을 지나치게(?) 열심히 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도 20대, 스스로 선택한 길이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소년들은 야망을 가져야 된다고 하지만, 대학원생은 야망을 버려야 할 것 같다. ’야망’이 상징하는 세속적 가치가 눈이 들어오는 순간 연구자로서의 눈은 멀게 되니 말이다. 다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지금의 숨가쁨이 훗날 대양을 주유(周遊)하는 돌고래의 해방감으로 바뀌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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