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에 킨들, 최근에 아이패드까지 보급되면서 종이를 포기한 (go paperless) 분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 합니다. 종이는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출력이나 보관이 번거로우며, 결정적으로 검색도 되지 않으니 Scalability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종이를 포기하기에는 아직도 그 매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픈 매력은 편안한 소파에 앉아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느끼는 종류의 센티맨털한 것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창조 활동을 도와주는 실용적인 가치입니다.


가용성 (anytime, anyplace)

창조 활동의 특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샤워하는 도중 위대한 발견의 씨앗이 되는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아르키메데스가 아니라도 많이 듣습니다. 저의 경우, 비행기에서 굉장히 창의적인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쳐가는 아이디어를 포착하는데는 아직 종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자 기기의 특성상 배터리 시간, 인터넷 연결 여부 등에 따라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기기가 작동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두뇌의 창의적 의욕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유연성 (freedom of expression)

가용성의 문제는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많이 해결된 것 같습니다. 10시간 사용 가능한 노트북이나 타블렛은 더이상 드문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정보기기에 비해 종이가 아직도 갖는 더 큰 장점은 유연성(표현의 자유)일 것입니다. 무제약의 저장공간(종이)에 자유로운 입력장치(펜)로 표현가능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으니까요.

연구를 위한 아이디어를 종이에 스케치하는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먼저 문제의 핵심적인 조건과 금방 떠오르는 해법을 몇가지 적어봅니다. 그러다 전체를 아우르는 큰 그림이 떠오르면 다이어그램을 그립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올때까지 지우개로 지워가며 몇번이나 수정을 거듭힙니다. 이제 완성된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세세한 알고리즘을 묘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알고리즘의 수행시간을 어림잡아 계산(back-of-the-envelope calculation)해 보고, 수행 일정까지 구상합니다. 마침내 그럴듯한 연구 계획이 나왔습니다!

물론 가상의(contrived)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하기 위해서는 오피스 패키지의 모든 기능을 총 동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이들간에 데이터를 옮기고 하는 사이에 창의적 활동에 필수적인 경쾌한 리듬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만약 여러 디바이스를 사용한다면 작업의 복잡성은 더욱 커집니다. 여백에 써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종이의 간편함과 대조되는 측면입니다.

자연스러움 (it just feels right)

기술이 더 발전하여 위에서 언급한 유연성의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해결한 정보기기가 나왔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때 저는 종이를 쉽게 버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어릴때부터 종이를 사용하여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왔고, 다양한 간접 경험(예: 종이에 뭔가 열심히 스케치하는 예술가를 담은 영상)을 통하여 '창조의 수단=종이'라는 공식이 어느 정도 두뇌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눈앞에 최신형 컴퓨터보다도 깨끗한 종이와 잘 깎인 연필이 있을 때, 창조적 두뇌가 훨씬 활발하게 움직이는 듯 합니다. 이것은 설명할 수도 없는 단지 '느낌'일 뿐이지만, 창조라는 미묘한 작업에 있어서 '느낌'의 차이는 결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특정한 작업 공간이나 필기구를 고집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정보기기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이런 느낌까지 흉내내기는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마치며

연구자로서 저의 목표중 하나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정보기기를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는 글은 아닙니다 ;) 하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된지 30년이 넘어서도 '창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아직도 종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좌절하기보다는, 종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떠올려 보려고 합니다.

항상 사용가능하며, 표현의 무한 자유를 보장하며, 종이의 촉감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정보기기, 꿈이라도 구체적으로 꾸어보면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겠죠? 애플의 디자인 철학과 관련된 예전 포스팅에서 발견한 인용구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For us, it is all about refining and refining until it seems like there's nothing between the user and the content they are interacting with."
-Jonathan Ive, Chief Designer in Apple Corpo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