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컨퍼런스 - ECIR (유럽 정보검색학회) 후기
한때 지금과 같은 형태의 컨퍼런스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분야의 최신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파되며 그 수단 역시 텍스트 위주에서 비디오 등으로 다양화되는 요즈음, 왜 굳이 몇달 전부터 논문을 준비하여 심사를 받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만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번거로운 컨퍼런스 대신 발표 동영상을 올리고 실시간으로 comment를 받는 식으로 바뀌리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첫 컨퍼런스인 ECIR에 참석하고 나서야 이것이 얼마나 단견이었는지를 느꼈습니다. 컨퍼런스는 정보와 지식만큼이나 관계 형성과 감정의 교류를 위한 장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인터넷으로도 할 수도 있지만, 지구 저편에서 온 연구자와 공감할 때 느껴지는 쾌감을 얻을 수는 없으니까요.
첫번째 가르침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도착한 첫날, 여정을 풀고 숙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제 이름을 불러서 돌아보니 지도교수님께서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를 한잔 하고 계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 앉아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첫 컨퍼런스를 성공적으로 보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뜻밖에도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 그리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지식’보다 ’사람’을 강조하시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서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둘째날 튜토리얼과 웍샵이 있었고 저는 Interactive IR Workshop과 Information Extraction Tutorial에 참석했습니다. 논문으로만 접하던 학자들의 발표도 발표였지만, 연구자들이 모인 자리인지라 즉석에서 생동감있는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녁에는 참석자들과 근처의 Bar에 가서 한밤중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University of Glasgow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라, 미국의 대학원 생활 그리고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첫 만남이었음에도 연구자라는 공통점 떄문인지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지도교수님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본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Query Evolution이라는 주제의 연설은 지금까지 키워드 처리에 중점을 맞추어 개발된 검색엔진이 좀더 자연어에 가까운 길고 복잡한 질의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표였습니다. 이어진 논문 발표를 들으면서 많은 발표자들이 3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서는 슬라이드의 불필요한 문장과 내용은 모두 빼고 최종 연습을 했습니다. Glasgow에서 온 친구들이 연습 발표를 지켜봐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발표날, 수차례의 연습 덕인지 발표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해지면서 자신이 생겨 실제 발표는 즐겁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발표 직후에 ‘단순하면서도 활용도가 높은 연구였다’, ‘알아듣기 쉬웠다’는 comment를 받으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특히, 검색학회의 원로이자 Microsoft Research Cambridge의 책임자인 Stephen Robertson경 등을 비롯하여 존경하는 연구자들이 많이 참석한 자리라 더욱 기뻤습니다.
발표를 마치고는 좀더 편한 마음으로 남은 일정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봄을 맞은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컨퍼런스를 마치고는 이틀 정도 파리에 머물며,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 센터, 피카소 박물관 그리고 몽마르트 언덕 등을 주마간산으로나마 돌아보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웹 겔러리에 사진을 올렸습니다.
긴장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ECIR 참석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Amherst에서 고민하면서 작업할 때에는 보잘것없이 여겨지던 작업이지만, 이렇게 세계 각국의 학자들과 교감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갈 때, 그 길의 끝에서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구본형 선생님의 책 한구절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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