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1년 반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유학 초기에 서슬퍼런 각오를 다지던 기억이 엇그제같은데,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짓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아직 낯설었습니다. 유학 초기에 대학원과 미국 생활에 동시에 적응해 나가는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는데, 이제는 미국에서 연구자로서의 삶이 공기를 들여마시는 것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처음에는 해수면에서 8000미터의 Death Zone으로 갑자기 올라간 느낌이었는데, 5년간 Sherpa의 심장을 얻었나 봅니다.


Journey is the reward라는 잡스의 말을 신봉하는 편이지만, 최근 문득 유학생활 동안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경력상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었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나 주변사람에게나 많은 것을 '강요'해오지 않았나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곳에서 시작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저를 있게해준 대부분의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만약 그 과정에서 상처가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여행을 통해 20년간 나를 지배해온 관습을 버리려고 했다.

출근하기 위해 아침에 하는 면도. 평일 대낮의 자유를 비정상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에 대한 공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 월급에 대한 안심. 인생에 대한 유한 책임.

20년만에 주어진 한달 반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구본형, '떠남과 만남' 초판 서문

그래서 계획한 한국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에 영감을 준 것은 예전에 읽었던 구본형씨의 '떠남과 만남'이라는 책, 특히 글머리에 인용한 서문이었습니다. 20년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발길 닿는대로 남도를 유랑한 그의 여정이 저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5년간의 대학원 생활, 그리고 앞으로 몇년이 될지도 모르는 미국 생활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달의 시간을 통째로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에 대한 몇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강요없는 자기통제

그동안 저의 행복도에 대한 Self-tracking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발견한 패턴이 한가지 있습니다. 외적인 강제가 있는 상황이나 (평일 오전, 시험, 면접, 교수님과의 미팅) 환경에서의 (학회장, 연구실) 만족도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입니다. 외적 제약이 스스로의 통제력을 높이고, 이런 모습이 자존감과 만족도를 높인 반면에, 외적 제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자기통제가 느슨해지면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꾸준히 공부하기 위해 잡지 기고를 요청했다는 안철수씨의 말처럼 외적 제약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끄집어낼 수 없다면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달간은 스스로 되도록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기통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외적인 제약을 매개로 의지를 끌어내기보다는 내면의 에너지를 활활 타오르게 하여 자신을 움직이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되,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는 순간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긴 휴가를 보내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자유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내는 것은 긴장과 이완의 완급조절을 필요로 하기에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떤 구속도 필요치 아니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기 냄새 (스타일)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눈에 풍겨나오는 여유와 자신만의 아우라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의 태도의 완성은 순간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유학생 처지에서는 사치이기도 합니다. 유학 초기에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한 생활을 뜻했지만 학생이라는 신분과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이루지 못했던 목표입니다. 


줄서지 않는 삶이라는 삶의 원칙을 일찌기 세웠기에, 굵직굵직한 선택에서나 소소한 일상에서나 '자기 냄새'를 피우기 위해 좀더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이는 눈앞의 작은 이득이나 다수에 묻어가는 선택의 안정감을 포기하는 노력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한 이득과 안정감은 그 이상의 성취감과 '매순간 깨어있는 느낌'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또한 안철수씨나 잡스의 말대로 삶의 목적이 Make a dent in the universe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선택할 부분은 아닙니다.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뒤로해야 하기에, 유학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선택입니다. 젊은 날, 자기 자신에게서 최대치를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런 노력이 주변 사람들의 허무감까지 보상해주지는 못합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이루더라도, 그 결과가 자신에게만 머문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요. 그리고 그런 성취가 얼마나 지속가능한 것일까요.


논의를 확장하면, 저는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말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돈 1원이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가치를 가져다준다면 이를 베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에 여유가 없을때 이런 믿음을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달 생계유지비를 받는 학생에서 직장인이 된 이 시점이 '여유와 베품'라는 화두를 다시 마음에 새길때가 아닌가 합니다. 


평생 기억될 한달을 위해

서두에서 유학생활을 고산 등반에 비유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작은 산봉우리에 올라서 구름겉힌 주변 풍광들 둘러보는 느낌입니다. 조만간 하산하여 또다른 봉우리로 향할 자신을 알기에, 지금 잠깐의 휴식이 더욱 달콤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위 세가지가 측정이 용이한 목표는 아니지만, 한달 뒤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을 때, 내 안에 무언가가 변했다는 느낌이 찾아오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블로그를 꾸준히 읽으신 분이라면 제가 시오노나나미의 팬이라는 점을 아실 겁니다. 시오노나나미는 보통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저는 '남자들에게'라는 책을 읽고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수십년간 고대사에 대한 저작을 전문으로 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일품이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책을 몇권 더 읽었지만, 최근에야 '로마인이야기 -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가운데서도 시오노나나미가 '남자중의 남자'로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책을 읽으며, '남자들에게'를 통해 보여준 남성론의 사실상 모델이라고 할만한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책에 등장하는 카이사르의 위대함에 대해 써 보려고 합니다.

유연한 판단력

'남자들에게'를 보면 카이사르에 대해 '수재 타입은 아니지만 판단력이 뛰어난 남자'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처럼 시오노나나미는 '머리가 좋은 사람'과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을 구별하는데, 카이사르는 후자의 대표격입니다. 다음 사례는 관습이나 상황 요인에 얽매이지 않고 독창적인 판단을 내리는카이사르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딱 한번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칼을 잃어버렸다. 갈리아인들은 그 칼을 전리품으로  거두어 자기네 신전에 모셔두었다. 이듬해에 다시 승리한 카이사르가  그것을 보았을 때, 측근들은 치욕의 증거물이니까 치워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미 신앙이 대상이 되었으니까 그대로 두라고 했다.
웬만한 지휘관같으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비록 정복당한 민족이지만 로마에 진정으로 동화되기 위해서는 고유의 문화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유연한 판단력은 전장에서 적군의 허를 찌르는 데도, 그 유명한 '루비콘의 강'을 건너는 데에도 발휘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카이사르가 그 능력을 발휘했던 정치도 군사도 결국 사람을 다루는 일입니다. 시오노나나미가 묘사하는 카이사르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나무라기만 하면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결과로 끝나기 쉽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설령 무모함으로 끝났다 해도 너희들의 용기는 가상하다고 치하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너희들이 전황의 진전이나 전투 결과를 총사령관보다 더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다고 여긴 오만함은 용서할 수 없다고, 그리고는 이런 말로 질책을 끝냈다.  "나는 너희들에게 용기와 긍지 높은  정신을 바라지만, 그 못지않게 겸허함과  규율 바른 행동을 바란다."

옛 애인을 만났다고 하자, 같은  계층에 속해 있으니까 우연히 만날 확률도 높았을 것이다. 그런 경우 평범한 남자라면 난처하게 여긴 나머지 본의 아니게 모르는 척하고 지나칠 것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내한테는 잠깐 가디리라고 말해놓고, 참석자들이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옛 애인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상냥하게 잡으면서 묻는다.  "어떻게 지내시오? 별고 없으시죠?"  여자는 무시당했을 때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 법이다.
이처럼 실패한 부하 병사에게나, 옛 애인에게나 카이사르는 자신이 관계를 맺는 상대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귀족정신

귀족이라는 말이 물질적 풍요와 동의어처럼 되어버린 요즘이지만, 본래의 의미는 자신의 지위나 품격에 걸맞는 행동양식(Noblesse oblige)을 가리킵니다. 카이사르는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신념에 충실한 삶을 지향했고, 스스로의 품격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진정한 귀족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카이사르는 평생 동안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지향한 사나이기도 하다. 그의 신념은 국가체제의 개조이고, 로마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으면, 즉 '원로원 최종 권고'에 굴복하여 군단을 내놓으면 내전을 피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질서 수립은 꿈으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는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온  보람이 없다. 보람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분노나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준으로  그들과 똑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는가.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우월하다는 인식이 자칫 '자만심'이 될 수도 있지만, 위 글에서처럼 스스로의 행동에 높은 기준을 세우고 지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치며

위에서 언급한 위대함의 조건의 공통점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로마인 이야기'에 드러난 카이사르는 많이 배우거나 재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지만, 이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을 일구어냅니다. 그는 또한 조숙한 천재라기보다는 젊은 시절 경험한 많은 방황과 실패를 토대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업적을 이루어낸 대기만성형에 가깝습니다.  

예전에 '빌게이츠가 우리나라에 태어난다면...'식의 유머가 유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이사르가 현재의 우리나라에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스팩 경쟁 열품 등에 휩싸여 자격증이나 영어 공부 등에 젊은 날을 대부분 보내지 않았을까요. 또한, 창업자들의 실패를 자산으로 여기는 실리콘벨리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 창업이든 취직이든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환경의 불리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성공하는 사람의 조건이긴 하지만, 다양한 성공의 사례를 가르치고 젊은이들의 실패에 좀더 관대할 수 있다면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이 좀 더 많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