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나라가 그리스를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죠? 이럴 때는 특히 서울광장에서 얼싸안고 소리지르고 있을 친구들이 부럽지만,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만하니 스포츠의 힘이 참 대단합니다. 며칠 전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교훈을 실감한 일이 있어 소개합니다. 

보도를 통해 많이들 아시겠지만, 최근 미국에서 메이저리그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있습니다. 퍼팩트 게임을 기록하던 디트로이트의 투수 존 갈라라가(John Galarraga)가  9회 2사후에 마지막 타자를 상대로 잡아낸 내야땅볼 아웃을 1루심 짐 조이스(Jim Joyce)가 안타로 판정하여 기록을 놓치게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명백한 오심을 범한 심판을 질책하고 기록을 놓친 투수를 위로했었는데요, 훈훈한 뒷이야기가 소개되면서 여론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우선 존은 오심 직후 그 당사자인 1루심을 향해 미소를 보이고 (속은 탓겠지만)  다음 타자를 침착하게 처리하여 경기를 마무리지었습니다. 경기 직후 비디오 판독으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1루심 짐은 곧바로 존에게 다가가 눈물을 글썽이며 진심어린 사과를 하였고, 존은 그에게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라며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넸답니다. 다음날 존은 경기 시작전 행사에서 아직도 죄책감에 빠져있는 짐의 손을 잡으며 공개적인 용서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나중에 보도되고, 평생의 위업이 될 수도 있었던 기록을 다른 사람의 실수로 날렸음에도 따뜻한 관용을 보여준 투수와,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 심판 모두에게 역사에 남은 품위있는(classy / noble) 행동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결국 투수는 기록상의 '퍼팩트 게임'을 잃었지만, 그 이후의 행동으로 그보다 훨씬 값진 영예를 얻은 것입니다. (존은 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주간 MVP에 선정되기도 합니다.)

흔히 스포츠의 목표를 더 나은 기록을 세우고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스포츠의 더 큰 목표는 '인간으로부터 최선의 모습을 끌어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이런 모습은 대부분 한계를 뛰어넘는 기록이나 경기력이라는 형태로 발현되지만, 때로는 존과 짐의 경우에서처럼 실수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과오를 덮어주는 차원높은 인간미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인지, 오심 논란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야구의 전통에 위배되는 비디오 판독 등의 기술적인 해결책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야구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 시즌에 스트라이크 존이 갑자기 넓어져 오심 논란이 자주 벌어지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그라운드에서의 퇴장 사태가 폭증했다고 합니다. '경기시간 단축'이라는 그다지 설득력없는 이유로 야구라는 스포츠의 핵심이 되는 규칙을 인위적으로 바꾼 KBO측, 그리고 팬들 앞에서 서로 욕설과 삿대질을 하는 선수단 및 심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씁쓸한 기분이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대표팀이 미국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는 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키피디아는 스포츠맨쉽(sportsmanship)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Sportsmanship expresses an aspiration or ethos that the activity will be enjoyed for its own sake, with proper consideration for fairness, ethics, respect, and a sense of fellowship with one's competitors. Being a "good sport" involves being a "good winner" as well as being a "good loser".


위 정의는 '스포츠'라는 행위의 본질이 '그 자체로서 즐기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우리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인터뷰에 '반드시 이기겠다' 보다는 '경기를 즐기겠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변화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의 좋은 성적은 이러한 태도 변화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바쁜 1학기를 끝내고, 논문을 한편 제출하고, 마이크로소프트 빙(Bing) 서치에서의 인턴 생활을 위해 시애틀에 온지 일주일이 되어서야 블로그를 쓸 여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기복 없이 꾸준히 쓰려고 하지만, 글쓰기를 손에서 놓은지가 오래 될수록 다시 잡기도 힘들어지는군요. 그동안 학교에서 논자시 및 석사 학위 자격 심사를 통과하였고, SIGIR에 첫 논문을 내었으니,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은가요.

대학원에서의 첫 3년을 마치고, 회사로 출근하여 첫주를 마치고 난 지금, 많은 생각이 교차합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보낸 시간과 내가 배우고 익힌 것들, 검색 연구라는 같은 일을 하지만 많이 다른 회사 사람들,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해야할 일들...

그중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학생과 연구자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학업과 연구를 병행하였지만, 주로 성적과 논문으로 평가받고 '졸업'이라는 당면한 목표를 앞둔 상황에서,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연구자의 본분과는 조금 거리를 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 와서는 수억명이 매일 사용하는 검색 엔진의 성능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그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사람들을 만나고, 저도 같은 책임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항상 사용자 데이터가 없는 것이 고민이었는데, 여기 와서는 너무나 많이 쏟아지는 데이터를 어떻게 감당할지가 고민입니다. 

이는 분명 제가 꿈꾸던 일이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학교에서 연구를 할 때는 제한된 데이터를 가지고 온갖 가정을 세워가며 결과를 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여기서는 충분한 데이터가 주어지는 대신에 그동안 엄청난 인원과 자원을 투입하여 갈고닦은 시스템의 성능을 높이지 못한다면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데이터를 얻는 일에서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이를 검증하고, 실제 서비스에 적용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도 큰 도전입니다. 

어쨌든 이제 일주일이 지났지만, 검색 연구자로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단순한(?) 검색 모델들이 실제 현업에 적용되기까지 다양한 변형을 거친다는 점, 그리고 실제 그 정도 규모의 검색 서비스가 이루어지기까지는, 핵심이 되는 색인 및 검색 모듈 만큼이나 이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지원 모듈이 중요하다는 점도 배웠습니다. 미국에서의 회사 생활,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조직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앞으로 주어진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최대한 배워가려 합니다. 좀더 자주 이곳을 통해 소식 전하겠습니다. 

P.S. 시애틀에 도착해서 찍은 사진을 몇장 올립니다. 








개발과 연구, 개발자와 연구자

어린 시절 나는 찰흙을 가지고 무언가 만드느라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신문과 TV에 나오는 각종 신기한 물건을 찰흙으로 만들어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스스로 조물주인양 흐뭇했었던 모양이다. 대학시절 전공했던 전자공학 대신 컴퓨터 관련 수업에 더 빠져들었던 것은 그때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늘 물리법칙에 구속을 받는 전자공학과는 달리 컴퓨터는 프로그래머가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않고 마음껏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니 말이다. 

병역특례 근무를 했던 회사에서도 나는 참 즐거웠었다. 낮에는 통신회사의 복잡한 요금계산 로직을 구현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밤에는 내 자신의 모든 정보를 내게 맞는 방식으로 관리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달력으로 시작했던 것이 연락처, 할일, 지식 등등이 멋붙고 나중에는 기록된 정보에 대한 통계를 멋진 차트로 만들어주는 모듈까지 생겼다. 스스로의 삶의 '만족도' 그래프가 (당시에 그런 것도 기록했었다 ;)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뿌듯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고, 이를 실제로 활용하면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차츰 개선해가는 과정은 참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회사 생활을 마치고 유학을 시작할 무렵, 나는 드디어 내가 꿈꾸던 일을 한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혼자서 스스로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 및 기반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약 3년이 지나 나는 어느덧 실험하고 논문쓰는 대학원 생활에 익숙해졌다. 미국이라는 낯선 환경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그런데 최근들어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검색 관련 연구를 하다보니 알고리즘 및 프로토타입을 구현할 일이 자주 있는데, 예전만큼 프로그래밍이 잘 되지도 않고 개발에 대한 흥미도 많이 잃은 것이다. 

최근에 하는 고민입니다. 오늘은 이런 문제의식을 토대로 '개발(programming)'과 '연구'라는 활동의 관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CS연구자에게 개발은 어떤 의미일까요? 개발과 연구를 병행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왜 개발과 연구를 병행하는 것이 어려운가?
얼핏 생각하기에도 개발과 연구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은 둘다 본질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개발자는 프로그램의 설계와 구현을 통해서, 연구자는 가설과 검증을 통해서 문제를 풀어냅니다. 또한 끊임없이 뭔가를 쓰고, 결과를 확인하고, 고친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유사한 활동이니 쉽게 병행할 수 있을까요? 3년간의 개발자 생활과 3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통해 얻은 결론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두가지 활동이 각각 완전한 집중을 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폴 그라함은 좋은 개발자라면 머리속에 프로그램의 코드를 완전히 넣고 마음껏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학자들은 세상의 흐름을 밎고 자신의 문제에 오롯이 몰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완전한' 인데, 창조적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데 있어 90%의 집중, 80%의 집중은 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가지를 모두 열심히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날려는 것과 같습니다.

또다른 측면은 연구와 개발이 내용상으로는 전혀 다른 영역의 활동이며 각각을 위해 상당한 양의 정신적 컨텍스트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개발자가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의 설계 및 구현에 관련된 세부사항, 실행환경, API, 기타 등등 엄청난 양의 배경지식이 머리속에 담겨야 하며, 연구자의 경우에도 기존 학설 및 자신의 가설, 실험 방식과 결과 등을 항상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완전한 집중'과 이점을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개발(연구)을 위해 단련된 두뇌가 연구(개발)에 적응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개발과 연구 활동이 추구하는 목적 자체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보통의 개발은 그 결과물인 소프트웨어 자체가 목적이지만, 연구를 위한 개발에서 소프트웨어는 가설 검증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 프로젝트에서 개발을 위한 시간과 노력은 그다지 높게 평가받지 못합니다. 연구를 하면서 개발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것은 연구자에게 개발이 갖는 우선순위가 낮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발과 연구를 어떻게 병행해야 하는가?
이처럼 개발과 연구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어느 한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CS연구자에게 있어서 (계산이론 등의 순수 이론 분야를 제외하고는) 개발 능력은 상당히 중요한데, 연구의 생산성과 품질이 상당 부분 자신이 작성한 코드의 질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머신러닝 등의 알고리즘 연구자라도 실험에 쓸 수 있을 정도의 성능과 정확도를 가진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하며, 실제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야 하는 검색이나 HCI등의 분야에서는 오랜 기간 사용가능한 견고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습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개발, 어떻게 해야 연구와 병행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자신이 풀타임 개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연구자의 본업은 연구이기에, 개발자로서는 파트타임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개발에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머리에 항상 자신의 프로그램을 넣어둘 수 있는 사치는 허용되지 않으며, 프로젝트에 관한 사항을 모두 잊은 상태에서도 신속하게 다시 개발에 착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최근에 다시 깨닫고 있는 것이 문서화와 테스트의 중요성입니다. 잘 쓰인 문서를 읽고 테스트를 돌려보면 자신의 코드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고, 해당 기능의 동작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서가 없어 개발에 다시 착수할 때마다 소스코드를 다 훑어야 한다면, 그리고 테스트가 없어 코드를 수정하고도 제대로 동작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면 생산성이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물론 가능하면 애자일(agile)한 언어를 사용하고, 잘 모듈화된 코드를 작성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개발 툴 및 방법론은 따로 포스팅하겠습니다.)

이외에도 건강한 코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코드 리뷰(code review)입니다. 즉, 정기적으로 자신이 짠 코드를 훑어보고 문제점을 찾아내고, 테스트 및 문서를 추가로 작성하는 등의 유지보수 활동을 (주로 한가할 때) 해야 한다는 겁니다. 평소에 기능을 구현하거나 문제를 수정할 때에는 보통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돌아가는 코드를 만들고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코드 리뷰을 통해서 전체 설계에 어긋나는 부분을 찾아서 개선하고 코드를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코드리뷰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고감자님의 글을 참고하세요.)

이런 준비를 하더라도 역시 머리가 개발 모드에서 연구 모드로 넘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개발에 착수한 후에 제대로 생산성을 내기까지 최소 이틀 정도가 걸리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정 조정을 통해 개발이 필요한 일을 한번에 모아서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특정 시간에 특정 활동을 한다는 규칙을 세우는 것도 두뇌가 준비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오전에 연구 관련된 활동을, 오후에는 개발을, 저녁에는 블로깅 등 기타 활동을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마치며
최근 개발 프로젝트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개발을 전혀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역시 불가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회사에서나 학교에서나 나이가 들수록 실제로 코딩을 하는 빈도는 줄어드는 게 보통이지만, 스스로 개발을 하지 않더라도 관리자로서 개발 프로젝트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더 큰 책임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발자로서의 '감'을 잃은 관리자가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정체에는 개발에 대해 무지한 관리자들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요? 아직도 제게는 쉽지 않지만, 위 사항을 지키기로 노력하면서부터 개발과 연구를 병행하는 일이 많이 쉬워진 느낌입니다. 어렸을 때 찰흙놀이를 하면서 느꼈던 희열, 처음 짠 프로그램을 실행시켰을때의 흥분을 머리가 희끗해질때 까지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iPad에 관한 기사 중 TIME지의 Stephen Fry가 iPad 디자인 및 개발 담당 Senior VP, 그리고 스티브 잡스를 모두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도 맥북과 iPod Touch를 쓰고 있으며 주변사람(특히 개발자)들에게 애플 제품을 많이 권하는 편이지만, 이 기사에 실린 iPad의 개발철학을 듣고서는 애플이 진정 '컴퓨팅의 미래'를 보고있다고 느꼈습니다. 얼마전 구글의 경쟁력에 관한 글을 썼는데, 오늘은 애플의 경쟁력을 '철학'의 측면에서 분석합니다.


기능이 아닌 경험을 제공한다

우선 애플의 디자인담당 수석부사장인 Jonathan Ive는 iPad의 본질이 기능이 아닌 경험이며, 들어간 기능보다 빠진 기능들이 더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보통은 더 많은 기능을 미덕으로 생각하는데, iMac, iPod, iPhone, iPad를 모두 디자인했다는 그의 말은 남다릅니다. 

제품의 가치가 개별 기능의 총합에 비례하지 않으며, '경험'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기능이라면 빼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애플이 자사의 품질기준에 어긋나는 앱을 엄격한 심사로 가려내는 것이나, 아이폰 OS에 자칫 기기의 성능을 현저하게 떨어뜨릴 수 있는 멀티태스팅을 아직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런 철학에 기초한 의사결정입니다. 

"As for everything else, it's not about the features — it's about the experience. You just have to try it to see what I mean."

"In many ways, it's the things that are not there that we are most proud of," he tells me. 

"For us, it is all about refining and refining until it seems like there's nothing between the user and the content they are interacting with."

위의 밑줄친 표현이 명확하게 전달하듯, 기능이 아닌 경험이라는 말의 의미는 사용자가 수단(제품)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목표(컨텐츠)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몸의 일부인 것 처럼 그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하는 것은 가히 도구(tool)로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가 아닐까요.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한다

저자는 애플의 또다른 성공비결이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감성은 이성적 판단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론을 내놓기에 사람들이 애플 제품에 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회사와 달리 애플의 제품에 광적인 팬이 많다는 것은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합니다. 

Apple's success has been founded on consumer products that address this side of us: their products make users smile as they reach forward to manipulate, touch, fondle, slide, tweak, pinch, prod and stroke

I had been prepared for a smooth feel, for a bright screen and the "immersive" experience everyone had promised. I was not prepared, though, for how instant the relationship I formed with the device would be

But for me, my iPad is like a gun lobbyist's rifle: the only way you will take it from me is to prise it from my cold, dead hands. 

위에서 저자는 iPad를 본 순간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설득하려고 들지 않고 감동을 주는 제품이라면 성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감동을 받은 사용자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자신이 그 제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당화시킬테니까요.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그 감동을 전하려고 노력할테니까요. 

독립 제품이 아닌 플렛폼

예전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iPod에서 출발하는 애플 모바일 기기의 기본적인 철학은 제품을 기반으로 하는 플렛폼을 개발하고 육성하는 것입니다. 일단 생태계가 형성되고 나면 돈을 들여 광고하거나 컨턴츠를 개발할 필요도 없으며, 고객 충성도 역시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iPad에 대한 유명 출판사 사장의 말을 들어봅시다. 

"it gives control back to us and allows us to discover how the market is developing. Frankly, when I saw the iPad, it was like an epiphany ... This has to be the future of publishing. You'll know if you've spent any time with one."

이처럼 출판사들은 저가 공급을 강요하는 아마존보다는 가격 결정권을 부여하는 애플에 더 호의적입니다. 컨텐츠 기기의 경쟁력이 사용가능한 컨텐츠의 양과 질에 좌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iPad는 아마존의 아성인 전자책 시장을 상당부분 잠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며

흔히 하이테크 회사의 경쟁력은 기술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애플은 기술 측면에서도 세계를 선도하는 회사이지만, 애플의 경쟁력을 완성하는 것인 이러한 철학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어차피 어떤 회사도 모든 기술을 스스로 개발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떤 기술을 가졌냐보다는 보유한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iPad 발표시에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인문학(Liberal Arts)과 기술의 교차점에 서있는 회사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애플이 기술 만큼이나 그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임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 나오기를 기원해봅니다. 

요즘 우리나라 인터넷에 대한 걱정들이 많습니다. 얼마전 저도 한국 인터넷을 술자리에 비유한 글을 썼는데, '한국 인터넷에서 잘못 끼워진 첫 번째 단추, 네이버'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글에 언급된 검색 성능에 대한 비교가 100%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검색 결과의 바탕이 되는 컨텐츠 자체가 다르기에), 적어도 네이버로 대표되는 포탈의 비즈니스 모델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제기는 탁월합니다. 

여기서는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른 몇가지 의문을 정리하고 검색 연구자로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이후에 언급한 '네이버'는 한국의 포탈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네이버는 evil인가?

예전에 iPad에 관한 글에서 플렛폼 전략을 언급했는데, 네이버는 사용자가 컨텐츠를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플렛폼 기업입니다.  여기까지는 탓할 일이 아닙니다. 네이버의 문제는 플렛폼 기업으로서의 역할에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 문제는 인터넷이라는 개방된 플렛폼 안에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닫힌 플렛폼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네이버가 우리나라 인터넷 트레픽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관계로 우리나라 인터넷 전체가 외부에 대해 닫힌 결과를 낳았습니다. 네이버에서 외부 글을 검색하거나 외부에서 네이버의 컨텐츠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에 구글은 인터넷이라는 플렛폼의 사용성을 높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네이버와 구별됩니다. 

두번째 문제는 플렛폼 기업으로서 도덕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구글의 Don't be evil 모토나, 혹은 최근 타산지석이 되고 있는 애플의 앱스토어 심사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플렛폼이라는 생태계를 운영하는 주체는 모든 참여자에게 (심지어는 경쟁 기업에게까지도)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어겼을 경우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플렛폼 운영자로서의 지위와 수익은 참여자들이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포탈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포탈은 한국 인터넷을 광장이 아닌 술자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몇개의 닫힌 포탈이 대부분의 웹 트레픽을  과점하는 구도가 지속되고, 더욱이 포탈 내에서도 제대로 된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인터넷 컨텐츠의 질적 저하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이 갖는 지식 정보의 공유 플렛폼으로서의 기능을 감안하면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의 문제입니다. 

글 하나를 찾거나 등록하기 위해 몇개의 사이트를 뒤져야 하고, 막상 검색 결과조차 광고로 도배되어 있다면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초기화면에 선정적 기사로 가득하다면, 공들여 쓴 글이나 비디오가 갑자기 삭제되기라도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네이버의 전략은 지속 가능(sustainable)한가?

기업이 사회적 책임과 수익성은 별개의 문제이기에, 만약 사회적으로 최선이 아닐지라도 수익을 낼 수 있다면 개별 기업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네이버의 전략이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플렛폼 기업으로서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양질의 컨텐츠를 공급할 수 있는 CP(e.g. 파워블로거)의 입장을 상상해봅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컨텐츠에 대한 통제와 소유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포탈 블로그나 지식인에 종속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포탈은 
현재 상태로는 좋은 컨텐츠를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인터넷 시대에 검색되지 않는 정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검색 광고의 남용과 기술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컨텐츠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어려워 보입니다. 

한때 인터넷 그 자체였던 야후!의 사례를 들어봅시다. 야후!는 지금도 단일 웹사이트로는 인터넷상에서 가장 방대한 컨텐츠를 자랑하지만, 결국 구글에 검색 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관문으로서의 주도권을 내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미디어 회사로 규정한 야후!는  막대한 양의 자체 컨텐츠와 편집 노하우를 경쟁력으로 내세웠지만, 전세계의 컨텐츠를 모두 모아 원클릭에 제공하는 구글 검색에는 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장 시장 판도가 바뀌지는 않겠지만 추세는 명확해 보입니다. 컨텐츠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모바일 웹의 대중화로  가벼운 검색엔진이 각광받게 되며, 특히 구글에서 막대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는 기계번역 기술이 사용 가능한 수준으로 좋아진다면, 상황은 급속도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검색엔진을 바꾸는데는 단 5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네이버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네이버의 현재 전략이 장기적인 생존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당장 모든 컨텐츠를 외부에 개방하고 초기화면을 구글처럼 바꿔야 할까요?  특히 이부분은 검색 기술의 비즈니스적 가치와 관련되기에 검색 연구자로서 흥미있는 주제입니다. 

얼마전에 언급했듯이 구글의 검색기술은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10년째 끊임없는 혁신을 지속하고 있으며, 검색 및 기타 서비스를 위해 하드웨어와 운영체제에서 시작하는 풀스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이크로소프트가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Bing Search조차 아직 구글의 아성에 아직 별다른 상처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고유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자사의 비교우위는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예컨데 네이버의 현재 경쟁력은 컨텐츠에 있는데 이를 구글 검색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선 외부 컨텐츠에 대한 검색을 강화하면서 자체 컨텐츠를 서서히 공개하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포탈이 자체 데이터 공개를 꺼리는 이유를 이해못할바는 아닙니다.

어쨌든 컨텐츠 개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이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검색 기술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합니다. 앞서 구글의 막강한 경쟁력을 언급했지만 검색 알고리즘(PageRank)과 대용량 서비스를 위한 기반 기술(Map-Reduce / BigTable)은 논문이나 오픈소스 등의 형태로 공개된 부분도 많습니다. 또한 네이버가 보유한 컨텐츠에 대해서는 자체 DB의 Metadata나 사용자 Log를 검색을 위한 Feature나 랭킹 학습을 위한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기에 여전히 외부 검색엔진에 대해서는 훨씬 유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기대만큼의 성공은 아니겠지만, 구글과 경쟁하기 위한 마이크로소프트 Bing Search의 전략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선 Search Engine대신에 Decision Engine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구글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여행이나 쇼핑 부분을 집중 흥보했습니다. 검색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구글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인터페이스 측면에서도 여러가지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전략에 컨텐츠 오너로서의 장점과 한국 유저에 대한 이해를 결합한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마치며

삼성전자와 iPad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지만,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시대에 문호를 닫고 공정한 룰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근시안적인 전략입니다. 대한민국 인터넷 사용자로서 포탈의 변화를 기대해봅니다.